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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빈오승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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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만 조선인 중 일본에 남은 60만 명 ● 사회 밑바닥 생활…日 치안과 재정 부담 ● ‘지상낙원’ 선전에 9만3340명 북한행…남한 출신 98% ● “북한 땅에 도착한 첫날 ‘속았다’ 깨달아” ● 日 정부에 소송 이겨도 보상받기 어려워 ● “식민 지배 연장선상 차별…日 반성 일어나야” 지난 7월 21일 도쿄 와세다대 캠퍼스 옆 공간에 전시된 북송 재일교포들의 사진. 일본의 독립 언론 아시아프레스가 8년여에 걸쳐 탈북한 북송 재일교포 50명의 증언을 묶어 책을 냈다. 한낮 온도가 40도에 육박했던 지난 7월 21일, 도쿄역에서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와세다역에 내렸다. 밖으로 나오자 아스팔트 열기가 그대로 얼굴을 덮쳤다. 역에서 나와 몇 분 걸었을 뿐인데도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와세다대 캠퍼스 입구에 자리한 와세다 호시엔(早稲田奉仕園) 스콧홀은 붉은벽돌 건물이었다. 100년 가까이 자리를 지켜온 건물답게 계단과 벽돌 하나하나에 세월의 흔적이 배어 있었다. 정문 기둥에 붙은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제목은 '北朝鮮でどう生きたか―在日帰国者は(재일 귀국자는 북조선에서 어떻게 살았나'. ‘지상낙원' 선전에 북한행 택해…남한 출신이 98%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서늘한 실내 공기가 반가웠다. 옛 벽돌을 그대로 살린 벽면에 흑백사진이 줄줄이 걸려 있었다. 모두 한복을 차려입은 대가족, 상. 앞에 선 여성, 어딘가로 떠나기 직전인 듯한 인물들…. 사진마다 '撮影禁止(촬영금지)' 팻말이 붙어 있었다. 가족들에게 남겨진 유일한 흔적을 함부로 복제하지 못하게 해둔 것이었다. 30여 좌석에 이미 사람들이 다 차서 뒷자리에 다닥다닥 앉아 모두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이 지긋한 일본인이 많았고, 간간이 젊은 청년들도 보였다. 입구 테이블에는 신간 '증언·북조선 귀국자'가 쌓여 있었다. 이날은 이 책을 만든 사단법인 '북조선 귀국자의 기억을 기록하는 모임'과 일본 독립 언론 '아시아프레스 인터내셔널' 두 단체가 여는 사진전과 상영회를 겸한 일종의 북 토크였다. 18일부터 나흘간 이어진 행사의 마지막 날이었다.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1959년부터 1984년까지 대거 일본에서 북한으로 갔던 재일교포 중 탈북한 사람들이다. 당시 대규모 인구이동의 이름은 이른바 '재일교포 북송사업'. 광복 후 현대사에서 유례가 없었던 재일동포들의 대규모 인구이동은 1959년 12월 14일, 니가타항에서 1차로 975명이 승선하면서 시작됐다. 사진전을 보고 있는 일본인들. 이후 1984년까지 총 187차례에 걸쳐 북송선이 운항됐고, 재일교포와 일본인 가족 6000여 명을 포함해 무려 9만3340명이 북한으로 건너갔다 야마토게임 연타 . 1960년 기준 재일교포 인구의 16%, 무려 6.5명 중 1명에 해당하는 대규모였다. 주목할 대목은 이들 대부분이 북한에 연고가 없었다는 것. 거의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98%가 남한 출신이었다. 이들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북한을 '조국'이라 부르며 배에 올랐다. 김일성 정권은 이들을 '귀국자'로, 이들이 탄 배를 '귀국선'이라고 불렀다. 당시 일본 정부와 미디어는 북한과 조총련이 내세운 '지상 낙원'이라는 선전에 어떠한 의구심도 품지 않은 채, 북한행을 지지했다. 오사카에 본사를 둔 '아시아프레스'는 일본 내 프리랜서 기자들로 구성된 독립 언론이다. 1993년부터 북한을 취재해 온 이시마루 대표를 비롯해 이곳 기자들과 뜻을 같이하는 재일교포, 일본인들이 8년 전 사단법인 '북한 귀국자의 기억을 기록하는 모임'을 결성했다. 이들은 북한으로 건너갔다가 남한이나 일본으로 탈북한 재일교포들의 목소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난 귀국자 1세 50명의 증언을 책으로 묶어 펴낸 것이다. 이날 행사에는 당시 북송 현장 기록을 담은 다큐멘터리도 상영됐다. 부모가 제주에서 건너와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 영상 작가 고오 히로오(康浩郎·1938~2024) 씨가 니혼대 예술학부 재학 중이던 1959년 12월 제1차 귀국선이 니가타항을 떠나는 상황을 카메라로 담은 영상이었다. 행사장에 모인 사람들. 스크린에는 '외국인 등록(外国人登録)' 창구에서 서류에 도장을 찍는 한 남성의 옆모습에서 화면이 바뀌더니 '귀환 전용(帰還専用)'이라 적힌 열차 승객칸 표지판이 클로즈업됐다. 이어 인파 속에서 만세를 부르듯 손을 흔드는 이들과 흰 두루마기를 입고 무리 지어 이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화면을 채웠다. 이 필름은 발표되지 못한 채 63년간 방치돼 있다가 곰팡이가 핀 상태로 발견됐다고 한다. 복원 후 2021년부터 간사이 지역에서 몇 차례 시사회가 열렸는데, 고오 히로오  씨는 정식 작품으로 완성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2024년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1959년 북송 현장을 찍은 필름. 국적 사라진 재일조선인, 일본 정부-김일성 합작으로 북송 행사가 끝나고 아시아프레스 관계자들을 만나 북송사업 전반에 걸친 이야기를 들었다. 먼저 만난 사람은 이시마루 지로 대표다. 행사장 한쪽 끝에 서서 인터뷰가 진행됐다. 야마토2 우선 왜 당시 재일교포들이 대거 북한행을 택했는지부터 궁금했다. "뿌리는 광복 직후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45년 패전 당시 일본에 살고 있던 조선인은 약 200만 명에 달했는데 이 중 140만 명은 1년여 사이에 한반도로 돌아가지만 60여만 명은 일본에 남았습니다. 이들은 광복과 동시에 일본에서 국적을 박탈당하며 '일본인' 바깥으로 밀려납니다. 국적이 없으니 외국인으로 살게 된 거죠. 체류 상황도 불안정한 것은 물론 건강보험·국민연금에서 배제됐고, 진학·취업·결혼 전반에서 차별받았습니다. 이들의 생활보호 수급률과 범죄율이 당시 일본인 평균보다 훨씬 높았다는 통계가 반영하듯 일본 사회 밑바닥에서 힘들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집도 주고 자식들 교육도 해준다고 하는 북한 주장에 솔깃해질 수밖에 없었겠지요." 이시마루 지로 아시아프레스 대표. 당시 일본 정부도 이들의 등을 떠밀었다면서요. "일본 정부는 귀국을 요구하는 움직임을 '절호의 기회'로 여겼습니다. 재일조선인을 치안과 재정에 부담을 주는 존재로 여겨오던 차에 김일성 정권이 '우리가 책임지겠다'고 하니 반긴 거지요. 1958년 11월 사회당과 공산당 주도로 '재일조선인 귀국협력회'라는 일본인 단체가 결성됐고 자민당부터 공산당까지 모든 정당이 이들의 귀국을 지지했습니다. 지방자치단체들도 지지 결의안을 채택했고요. '어차피 일본 땅에서 제대로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재일조선인에게 집단적 북한행을 인정하는 것이 인도적 조치'라는 공감대가 퍼졌습니다." 실제로 배에 오른 사람들은 어떤 이들이었습니까? "공사장 인부, 날품팔이 노동자, 공장 직공, 소규모 상공업 종사자, 학생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북한은 왜 이 사업을 주도했습니까. "한국에 대항해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세계에 과시하는 동시에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을 통해 대일 관계를 강화하려는 전략이기도 했습니다." "북한 땅에 도착한 첫날 '속았다' 깨달아" 책이 나온 뒤 일본 사회 반응이 뜨겁다고 들었습니다. "초판 5000부가 불과 2주 만에 다 팔렸습니다. 서둘러 2쇄 2000부를 찍었는데 그것도 동이 나는 바람에 3쇄를 기다리는 상황입니다. 내년에 한국에도 번역본이 나올 겁니다." 오래전 일인데, 왜 이렇게 관심이 높을까요. "그동안 조각조각 알려졌던 내용이 입체적, 다각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책을 사신 분들 중에는 순수한 일본 독자 분들도 있고, 북에 가족을 둔 이산가족 독자들도 있어요. 소셜그래프게임추천 출판사 쪽 얘기로는 오사카 쪽에서 많이 팔린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습니까. "예전부터 탈북자 취재를 많이 해왔습니다. 이번에는 도쿄에 살고 계시는 일곱 분 정도를 인터뷰했습니다. 북송선을 탔던 사람들 중 2세, 3세까지 합해 현재 일본에 200여 명, 한국에는 400여 명이 살고 계신 것으로 추산됩니다. 이분들을 어렵게 찾아 일본에서는 어떻게 살았고, 왜 북한으로 갔으며, 어떤 생활을 했는지 등을 집중적으로 들었습니다. 당시 북한으로 간 9만3000여 명 중에는 일본인 아내 등 6000명 이상의 일본인도 포함돼 있습니다. 한반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거죠. 책에는 일본인 아내들의 이야기를 별도 챕터로 다뤘습니다." 그에 따르면 "북한을 선택한 이유는 제각각이었다"고 한다. "선전을 믿고 떠난 사람, 부모 손에 끌려간 사람, 혁명을 꿈꾸며 건너간 사람까지 다양했습니다. 이분들 이야기를 직접 들으며 저라도 당시에 이국 땅에서 차별과 가난을 겪고 있었다면 똑같은 선택을 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죠. "당시엔 남한도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고, 일본과 수교도 맺어지지 않은 상태였잖아요. 북한을 선택한 분들 중에는 '곧 통일이 될 것'이라 믿고 간 분도 많아요. 통일이 되면 북에서 바로 고향 땅으로 내려갈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하지만 북한 땅에 도착한 첫날부터 '속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합니다." 일본 니가타항(港)을 떠나 북한 청진항으로 향하는 배에 오른 북송 재일교포들의 모습. 동아DB 무슨 상황이 벌어진 거죠? "책에도 나오는 표현인데 '청진 쇼크'라는 게 있어요. 도착지인 청진항에 내리자마자 환영 나온 북한 사람들 행색이 너무 초라하고 심지어 몸에서 악취까지 심하게 났다는 겁니다. 비누가 없어 양잿물로 씻어서 그랬대요. 이후 벌어지는 일은 상상 이상입니다. 자신들이 기대했던 '무상교육 무상의료 평등한 삶'은 당연히 거짓이었고 '자본주의 물 먹은 사람들'이라는 손가락질에 만성적인 물자 부족과 심지어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통제된 일상에 놓인 거죠. 이들이 얼마나 큰 좌절을 겪었을지 상상이 안 갈 정도입니다. 일본에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낼 수는 있었지만 검열 때문에 진실을 알릴 수가 없었대요. 오죽했으면 우표 뒷면에 암호처럼 '오지 말라'고 적었던 분들이 있고요.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생각에 정신적으로 무너져 정신병으로 돌아가신 분들도 계세요. 어떤 집안은 아버지가 눈을 감으면서 자식에게 '미안하다, 너무 미안하다, 나도 이럴 줄 몰랐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가셨다는데 이 증언을 듣는 저도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오락실황금성 ." 북한행이 순차적으로 이뤄졌는데, 그사이에 초창기에 건너간 사람들로부터 북한 내부 사정에 관한 정보가 유통되지 않았나요. "그래서 북송선을 탄 재일교포들은 처음 1, 2년간이 가장 많아요. 이후 좀 잦아드는데 후반부에는 가족이 있으니 따라간 분들이 있어요. 조총련에서 '간부 자녀 보내라'는 식으로 명령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런 경우는 완전히 인질이나 마찬가지죠. 사연은 제각각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잘못된 선택이었고, 귀국 사업은 완전히 실패한 겁니다." 일본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나요. "북한은 당연하고 일본 정부도 조총련도 돌아갈 배를 마련해 두지 않았습니다." 흔히 북송선 하면 '만경봉호'를 떠올리는데요. "1959년 첫 출항 당시 배정된 것은 소련 선박이었습니다. '만경봉호'는 북송이 상당히 진행된 1971년 8월부터 취항했습니다. 이후 니가타와 북한을 오가며 사람과 물자를 통행시키는 통로 역할을 했습니다." "일본 사람으로서 책임이 있다" 잊혔던 북송사업은 여러 면에서 현재진행형이라고 하셨는데. "당시 일본 정부와 미디어는 '일본에서 가난하고 차별 받으면서 사느니 같은 고국 땅인 북으로 가는 게 좋지 않겠냐'며 등을 떠민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심지어 진보 신문으로 평가받는 아사히신문도 예외가 아니었어요. 여기에 대해 일본 정부나 미디어에도 책임이 있는 것 아닐까요. 저는 미디어 종사자라서 그런지 미디어의 역할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당시엔 인터넷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이나 신문, 방송 같은 전통 매체 외에는 정보를 얻을 수 없었잖아요. 당연히 그걸 믿었고요. 그때 일본의 모든 매체에서 북한을 찬양하고 북한으로 가서 사는 게 더 낫다고 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가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이 있습니다. 지금 한국이나 일본의 젊은 사람들은 '북송사업'이라는 것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러니 좀 더 관심을 갖고 봐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일본의 재일교포 중에는 아직 친족이 북한에 남아 있는 경우도 많아요. 새로운 형태의 이산가족이죠. 이분들이 좀 더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한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시민단체나 당사자들이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묻는 활동도 하십니까. "저희는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건 하지 않아요. 다만 일부 당사자들이 직접 북한 정부나 조총련을 상대로 재판을 신청한 사례가 있어 이미 보도가 되기도 했습니다. 탈북해서 일본에 거주하는 가와사키 에이코 씨가 그 주인공인데 이번 책에도 그녀의 삶에 대한 인터뷰가 실려 있습니다 모바일 바다이야기릴게임예시 ." 재판 결과는 어떻게 나왔습니까. "북한이 보상하라는 결정은 났는데 현실적으로 가능하겠어요?" 얼굴 없는 가해자들 이번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행사를 지켜본 평범한 일본인을 만나고 싶어졌다.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인상 좋은 한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마침 은퇴한 저널리스트라고 했다. 미디어업에 종사했던 사람으로서 책임을 느껴 이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그의 말을 듣다 보니 당시 미디어 환경이 어땠을지 짐작이 가는 면이 있었다. "저는 1962년생이라 이분들이 북한으로 갈 때는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일본 미디어에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는 일본 사회 안에서 북송사업을 비판하는 시각 자체가 조심스러운 문제였어요. 조총련의 힘이 워낙 셌으니까요. 조총련에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보도가 나가면 신문사에 몰려와 항의했거든요. 그러니 항상 그들을 의식해야 했어요. 패전의 아픔이 팽배하던 당시 일본 지식인 사회에서는 반전 분위기와 함께 북한을 비판하는 것 자체가 '우익 세력에 가담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반공이 우익의 시각이었으니 비판하면 우익을 응원하는 꼴이 된다는 거였죠. 그러다 보니 좌파나 진보 세력은 북한을 더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도 반성하는 분위기가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북송 사업도 식민 지배 연장선상에서 생겨난 차별에서 비롯된 것 아닙니까. 이제야 이런 걸 자유롭게 검증할 수 있는 시기가 된 겁니다. 굉장히 늦게 이슈가 되고 있는 거죠." 1959년 겨울 니가타항을 가득 채웠던 오색 테이프와 환송 인파의 함성은 이제 없다. 오로지 그때 한 선택을 후회하는 사람들의 증언과 빛바랜 사진들과 편지로만 흔적을 남기고 있다. ‘재일교포 북송사업'은 국가와 이념이 그어놓은 선 위에서 개인의 삶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다시 확인시킨다. 이 비극에 책임질 사람들은 단 하나의 얼굴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한일 국교조차 없었던 때 일본 사회의 차별과 빈곤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던 이들에게 '조국으로 오라'고 손짓한 것은 고향 남한이 아니라 조총련과 김일성이었다. 북한은 거짓 선전을 했고 일본 정부는 등을 떠밀었고, 일본 언론은 환송 행렬을 미담처럼 보도했다. 진보진영은 '사회주의 조선이 우월하다'는 선전에 편승했고, 보수진영은 단지 '반공(反共)의 언어'로만 말했다. 이렇게 가해자를 하나로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이 사건을 지난 60여 년간 침묵 속에 가둬온 이유가 아니였을까.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은 그 비극을 낳은 침묵의 구조를 하나씩 짚어보는 일일 것이다. 폭염 속 도쿄 거리를 걸으며 그 일이 늦었지만 아주 늦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하고 일본 정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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