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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빈오승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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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몇 가지 고백부터 하고자 한다. 이 글을 제대로 읽지 않고, 나를 이단이나 사탄마귀로 몰아가는 사람들, 혹은 감신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많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강사 시절, 감리교신학대학교(감신대)에 객원교수 신분으로 7학기가량 출강했던 선생이다. 감신대에서 사랑을 참 많이 받았다. 그래서 그 사랑을 돌려주려 수업도 열심히 했다. 주에 한 번 대구에서 서울을 오가면서, 전공 3학., 1학년 필수교양 2학. 수업 외에도 늘 학생들과 스터디를 했다. 보통 칸트나 아리스토텔레스를 많이 읽었지만, 마지막 두 학기는 독일어로 철학 입문서를 읽는 강독을 진행하기도 했다. 감신에서 독일어로 논문을 읽을 수 있도록 지도할 여력이 있는 선생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정규 5학。 수업에 2시간 스터디까지 총 7시간을 하루에 몰아서 수업을 하노라면 입에서 단내가 났다. 새벽 6시 동대구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와 저녁 늦게 다시 기차를 타고 동대구역으로 내려가면 보통 12시쯤 되곤 했다. 감신대의 강사료는 무척 적은 편이어서 3학。 수업에 대한 강사료로는 왕복 KTX 비용과 。심 식사비를 내면 남는 것이 없었다. 다행히 5학.을 수업하면서 2학。가량의 강사료는 남길 수 있게 되었다. 그나마도 나는 감신에서 번 돈은 감신대 학생들, 특히 종교철학과 학생들에게 써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 학기에 꼭 한두 번은 학생들을 모아 회식을 했다. 돈이 없어도 그다지 아깝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달리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지만 학생들의 속마음을 듣고, 이야기를 나누며 지지를 보내주는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기에. 나는 이 일을 내 나름대로는 사역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위해, 미래의 사역자가 될 학생들을 잘 가르치는 것이 내 소임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운이 좋게도 지방사립대에서 전임교수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감신대에 더 이상 출강할 수 없게 되었다. 일개 객원교수 신분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었지만, 부디 학생들이 건강히 잘 지내기를 바랐다. 그러던 중, 이번 변선환 세미나 사건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충격을 받았다. 감신대가 우경화되고 있다는 것은 피부로 체험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이게 21세기 대한민국의 4년제 대학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내가 할 이야기를 듣고 나면, 소위 신앙 좋으신 분들 중에서는 나를 보고 자유주의자라고 매도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글의 서두에 분명히 밝혀 둔다. 나는 철학자다. 신학은 제대로 공부해 본 적도 없다. 더구나 변선환의 글은 쳐다본 적도 없다. 늘 수업 시간에 강조해 왔지만 다시 한 번 말한다. 나는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칸트주의자다. 나는 변선환 신학이 옳은지 그른지를 평가하거나 판단할 능력도 없다. 그에 대해서는 신학을 공부하신 여러 분들께서 많은 말씀들을 하셨으니, 나는 지극히 철학자로서,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로서 이 사태를 보았을 때 이번 사건이 얼마나 황당하게 느껴지는지를 말해 보고자 한다. 한 가지만 덧붙인 후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다. 나의 학자적 소신을 걸고 말한다. 몇몇 극우 학생들이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대해 분노하는 분들이 많은 줄 안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분노하는 것은 사태를 납작하게 보는 것이다. 저 학생들이 저렇게 되도록 방치한 대학도 죄인이고, 대학을 교회처럼 만들고 자유롭게 학문을 할 수 없도록 만든 교단도 죄인이다. 와중에 가장 큰 죄인은 교단과 큰 교회들의 눈치를 보며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교수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감신대에서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던 나 역시도 죄인이다. 나조차도 이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죄인 중의 괴수가 된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학문을 한다는 것의 의미 학문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모바일 야마토 아주 거칠게 말해 보자. 엄밀한 '학'으로서 학문을 한다는 것의 의미는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세계 자체를 분석하고, 이로부터 결론을 도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는 그 자체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으며, 우리는 이를 여러 방식으로 분석해 냈다. 물리학, 수학, 철학, 공학도 마찬가지다. 항상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사태들을 분석해서 결론들을 낸다. 대학은 이러한 학문들을 연구하고, 또 이 연구 결과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가르치고 연구하는 곳, 더 나아가 교양 교육까지 더해서 민주 시민을 양성하는 기관이 바로 대학이다. 이 당연한 이야기를 왜 하는가? 신학이라는 학문이 지닌 독특성 때문이다.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결과, 보수적인 신학일수록(혹은 이데올로기화된 신학일수록) 위의 학문적 방식을 전혀 채택하지 않으려고 하는 성향들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에 신학이라고 하는 학문은 거꾸로 간다. 즉, 자신들이 원하는 결론을 미리 정해 놓고, 그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전제들을 끌어온다. 세계와 사태를 주어진 그 자체로 분석하여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 여러 근거자료를 세계에서 추출한다는 것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그렇다. 물리학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자연현상들을 분석하여 물리법칙을 세운다면, 신학은 거꾸로인 경우가 많다. 이미 신이 있다고 전제하고 자연현상들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자연이 이렇게 거대하고 아름답고 복잡하다면 신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식이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자. 신학은 과연 엄밀한 의미에서 학문일 수 있는가? 신학이 학문일 수 있으려면 과연 신학은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문제는 교회가 이런 질문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교회와 교단은 늘 답을 정해 놓고 있다. 정말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 무엇인지 엄밀하게 분석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잘못하면 전통이 무너지니까. 그러나 고작 그 정도 분석으로 무너질 전통이었으면 왜 그 전통을 억지로 사수해야 하는 것일까? 새롭게 부수고 또 새롭게 세워 가면서 전통을 세워 갈 수는 없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도 교회는 관심이 없다. 내가 철학 학계 전체를 알지 못하기에 내가 경험한 칸트학회 이야기만 잠시 해 보고 싶다. 내가 만난 선배 칸트학자들은 대체로 겸손한 분들이었다. 인간 이성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고,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분명하게 인정하며, 아는 것에 대해서도 늘 조심스럽게 논지를 전개하려 애쓰시는 모습들을 지난 수년간 봐 왔다. 그래서 칸트학자들은 사실 누가 칸트를 비판해도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 그 논증만 확실하다면 칸트 비판을 통해 새롭게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자 한다. 그것이 바로 칸트와 더불어, 칸트를 넘어서 가는 길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으니까. 그러나 신학은 어떤가? 칼뱅과 웨슬리를 넘어서기 위해 칼뱅과 웨슬리를 비판할 수 있는가? 웨스트민스터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비판할 수 있는가? 보통은 여기에서 말문이 턱 막힐 것이다. 다만 신학 바깥에 서 있는 철학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이 지.이 매우 이상하게 보인다. 왜 수백 년 전에 유효했던 성경해석을 지금까지 오류 없이 받아들이고만 있는가? 지난 수백 년간 성경해석은 더 발전해 오지 않았단 말인가? 아니라면, 발전된 성경해석을 통해 교리나 신학도 수정-보완-발전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만약 어떤 물리학자가 1700년대 뉴턴 물리학만이 진리이고 양자역학은 거짓말이라고 말한다면 어떻겠는가? 또, 내가 1800년대 칸트 연구만이 진정한 칸트 해석이고, 2020년대 최신 칸트 연구와 해석의 지평은 잘못된 자유주의적 해석이라고 말한다면 어떻겠는가? 다들 나보고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할 것이다. 모바일 바다이야기 기프트전환 그러나 왜 교회는 신학에 그런 짓을 하고 있는가? 도대체 신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학문 연구와 신앙고백을 구분하지 못하는 감신대 이렇게 장황한 이야기를 쓰는 이유가 있다. 교단 신학교로서, 즉 대학으로서 기능해야 할 감신대가 교회처럼 되고 있기 때문에 이 지경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나는 진단한다. 교회는 교회고 대학은 대학이다. 그런데 감신대가 교회처럼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학생들에게 학문을 제대로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다. 지적으로 학생들에게 충격을 주고 흔들어 깨우는 역할을 하는 선생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고, 선생이 학생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가 없도록 만드는 구조도 문제다. 감신대에서는 학.마저도 날림으로 줘도 된다. A학。을 50%까지 줄 수 있고, 나머지 50%를 다 B를 줘도 되는 구조다. 원칙상 C를 주지 않아도 되니 어지간하면 다 장학금을 받는다. 국가장학금도 끊어질 염려가 없다. 그러니 안 그래도 7, 8등급을 받는 학생들이 공부를 열심히 할 이유가 없다. 열심히 안 해도 A나 B를 받으니까. 그러면 자기가 공부를 잘하는 줄로 착각하게 된다. 그리고 학교는 이를 겉으로는 은혜로운 척, 교회적인 분위기로 덮는다. 대학의 학.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안 그래도 대학 성적을 신뢰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와중에, 감신은 앞장서서 학. 인플레이션을 조장하고 있다. 이게 대학이 할 일인가? 물론 이는 감신대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국내 신학교 전반이 대체로 다 이런 상황일 것으로 짐작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학생들을 지적으로 흔들어 깨워 학문을 가르칠 수 있는 선생의 역할이 중요하다. 선생들이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감신은 학생들을 엄격하게 학문적으로 훈련하는 것에 그다지 관심이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수많은 학생들이 내게 찾아와 하는 말이 무엇인 줄 아는가? 들을 수업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이 등록금을 내고 이렇게 낮은 퀄리티의 수업을 왜 듣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공부에 의욕이 없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도 B는 나온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대학인가? 둘째, 학문 연구와 신앙고백을 구분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물론 나는 칸트를 연구하면서 칸트주의자가 되었지만, 칸트학자들 중에서는 칸트를 비판하면서 칸트주의자이기를 포기하는 사람들도 많다. 왜냐하면 칸트를 연구하다 보니 칸트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칸트학회는 이런 학자들을 동료 연구자로 당연하게 인정한다. 또한, 니체를 연구한다고 해서 니체주의자가 되지도 않고, 마르크스를 연구한다고 해서 공산주의자가 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변선환을 연구한다고 해서 왜 변선환의 신학을 받아들이는 것이 되는가? 나는 이것부터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러한 차원의 논의는 학문 연구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학문적 입장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신앙고백은 또 다를 수 있다. 나는 칸트의 최고선과 도덕신학, 요청이론을 주로 연구하지만 칸트의 이론을 신앙하지는 않는다. 칸트가 말한 도덕신앙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다. 나 역시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믿고,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였음을 믿으며,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 그러나 이를 믿는 것과, 그것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논의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는 감리회뿐만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반의 문제이겠지만,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한다. 이는 심각한 문제다. 변선환의 종교다원주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면 연구하면 된다. 그의 글을 읽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따져 보면 된다. 세미나에 들어가 발표자의 논증이 잘못되었다고 질문하면 된다. 학술대회의 종합토론은 그러라고 있는 시간이다. 릴게임빅뱅 동의하지 않는다면 반박 논문을 써서 발표하면 더 좋다. 변선환이 성서를 잘못 해석했다고 생각한다면 성서 본문을 들고 와서 반박하고, 웨슬리의 신학을 잘못 이해했다고 생각한다면 웨슬리의 텍스트를 가지고 반박하면 된다. 그게 학문을 하는 기본 태도가 아닌가? 그런데 연구 자체를 못하게 막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당신의 해석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그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를 허락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둘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보장된 학문의 자유가 감신에서는 보장되지 못하는가? 지금이 중세 마녀사냥이나 하던 시절인가? 퀴어신학도 마찬가지다. 내가 감신대에 출강하던 마지막 시기, 객원교수들은 퀴어신학이 이단으로 지정되었으므로 수업시간에 언급할 경우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취지의 단체메일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그 메일을 받고 상당히 당황했다. 왜냐하면 퀴어신학을 가르친다는 것과 퀴어신학을 옹호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이런 신학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이런 문제의식에서 이런 주장을 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런 비판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어떻게 그 신학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일이 되는가? 더구나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자신과 다른 신학적 입장을 전혀 접하지 않은 채 졸업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 아닌가? 오해가 없도록 덧붙이자면, 나는 퀴어신학 관련 논문이나 저서를 읽어 본 적조차 없다. 왜냐하면 학문적으로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덧붙이지 않는다면, 분명히 저 선생은 동성애 지지자이니 교단에서 쫓아내야 한다 등을 운운하는 사람이 분명히 나올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하는 내가 감리교인이 아닌 침례교인이라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감리교 교단이 침례교인인 나를 출교시키지는 못할 것 아닌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다음의 예시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일반 4년제 대학 국문과에서 윤동주는 민족시인이므로 가르쳐도 되지만 이태준이나 박태원은 월북한 빨갱이니까 가르치면 안 된다고 학생들이 성명서를 써 붙이는 것이 상상이 되는가? 윤동주를 민족시인으로만 읽는 것 역시 문제적이지만, 이태준이나 박태원을 읽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은 더 문제적이다. 이들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리는 문인들이다. 이태준이나 박태원을 공부한 중고등학생들은 북한을 추종하는 빨갱이가 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고 있다. 혹은, 사학과에서 친일파를 연구하는 학자는 친일파가 되는가? 박정희-전두환을 연구하는 근현대사 전공자는 군국주의자가 된단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나는 감신대에서 니체를 여러 번 다루었다. 특히, 감신에서 종교철학과 학생들과 한 학기 내내 <안티크리스트> 전체를 강독했던 시간은 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내가 수업에서 니체를 가르친다고 해서 학생들이 니체주의자나 무신론자가 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만약 그렇다면 가장 먼저 나부터가 칸트주의자를 때려치우고 니체주의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확고한 칸트주의자며, 니체의 주장에 공감은 할지언정 단 한마디도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독교 신학이 니체를 넘어서려면 니체의 기독교 비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나는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늘 강조했다. 니체의 기독교 비판에 흔들릴 신학과 신앙이라면 없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우리의 신앙과 신학은 그보다 훨씬 더 크고 넓은 것이 아니냐고. 변선환 신학이라고 다르겠는가? 설령 종교다원주의가 그토록 위험한 신학이라면 더욱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학생들에게 원전을 읽히고, 왜 문제가 되는지를 가르치고, 그에 대한 찬반 논쟁을 소개해야 한다. 그래야 학생들이 목회자가 된 뒤 누군가 종교다원주의적 질문을 던졌을 때 자기 머리로 대답할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런데 "이것은 이단이니까 읽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고 가르치면 무엇이 남는가? 모바일 릴게임손오공 그것은 교육이 아니라 금지목록을 외우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감신대는 최근 그 금지목록을 만드는 것에 이어, 관련 도서들을 학교 도서관에서 모두 반출시켜 버렸다. 21세기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분서갱유라도 할 참인가? 신앙고백과 학문 연구를 구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은 한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일 수 있다. 나 역시 그 고백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그 고백이 학문적 논의를 중단시키는 이데올로기처럼 사용되기 시작하면 문제가 달라진다. 신앙고백이 폭력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9월 17일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열릴 예정이던 변선환 세미나를 일부 학생들이 막아서며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외쳤다. 뉴스앤조이 경소영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다." 좋다. 그렇다면 왜 그런가? 성서학적으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다른 종교 안에서 살아온 사람의 구원 문제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타종교와의 대화 속에서 이 고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을 하는 것이 신학 아닌가?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하는 순간 "예수 외에도 구원이 있다는 말이냐"고 몰아붙이기 시작하면 신학은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고, 교수와 학생에게 남은 일은 그 답을 반복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대학은 왜 필요한가? 목사가 교회에서 교리문답을 가르치면 될 일이다. 독일어 단어 "Dogmatik"가 신학에서는 "교의학"이라고 번역되지만, 철학에서는 "독단주의" 혹은 "독단론"으로 번역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신천지 이야기를 조금 하고 싶다. 신천지가 심각한 위기로 떠오르게 되자, 한국교회는 신천지의 위험성을 매우 강조하면서 평신도들에게 신천지와는 논쟁하지 말고 교회 안에서 성경공부를 하라고 가르쳤다. 위험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한 10여 년 이상 지난 지금, 교회는 어떠한가? 교회 내 성경공부가 신천지와 만나 대화해서 무너지지 않을 만큼 견고한 토대를 쌓았는가? 그렇지 않다면 교회는 지금껏 뭘 했는가? 결국은 신천지로 넘어갈 사람은 넘어가고, 남아 있는 사람은 남아 있는 사람대로 연약하고 모르는 신앙 그대로가 아닌가? 변선환 신학도 마찬가지다. 정말로 위험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럴수록 더 연구해야 한다. 왜 위험한지를 학문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상대방의 입을 마녀사냥하듯 막는 것이 아니라. 이쯤 되면 차라리 교단 내 비인가 신학교로 전환하는 것이 어떨까? 나는 감신대 종교철학 전임교수 자리에 세 번 지원했으나 세 번 다 떨어졌다. 세 번 모두 총장 면접까지 올라갔는데, 한번은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당시 감신 종교철학과의 커리큘럼을 개편하고 싶다는 발전안을 서류에서 제출했었다. 애매한 커리큘럼을 정돈하여 철학적 훈련을 보다 강화한 후, Th.M이나 Ph.D 과정으로 진학하여 학문 연구를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이에 대해 한 심사위원 교수님이 질문하셨다. 그래도 감신은 교단신학교이고 교단의 사역자를 양성해야 하는데, 그런 철학적 작업이 어떤 선교적 의미가 있느냐고. 나는 소신껏 대답했다. 모태신앙으로 자라 신앙도 애매한 상태에서 신학교에 와서 사역자가 되어 교회 안에만 있다가 40대가 되면 오히려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다고. 그런 자폐적인 신앙인들이 상당히 많아졌다고. 그에 반해 엄밀한 철학 공부는 오히려 그리스도인이 교회 바깥에 있는 비그리스도인들, 심지어는 무신론자들과도 대화할 수 있는 힘을 길러 줄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정적이 흘렀다. 모든 심사위원의 표정들이 굳어 있었다. 나는 그때 알았다. 아, 여기는 이 정도 이야기도 통하지 않는구나. 물론 내게 질문한 심사위원 교수님은 선교학 전공자의 입장에서 물을 수 있는 질문이셨다고 생각한다. 알라딘릴게임추천 그러나 나로서는 면접장에서 어떤 느낌을 받았냐면, 감신대가 대학으로서의 정체성보다는 교단 신학교의 정체성, 즉 교단의 뜻에 일치하는 목회자들을 양성하는 교단 내 기관으로서 기능하고 싶어한다는 느낌을 정말 많이 받았다. 여기까지 오면 나로서는 조금 과격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하고 싶다면 차라리 감신대가 대학이라는 지위를 포기하면 되지 않는가? 감신대를 감리교신학대학교가 아니라 감리교신학원 내지는 감리교신학교 정도로 바꾸어서 교단의 입맛에 맞는 목회자들만 양성하면 모든 문제가 사라진다. 감리교회가 "우리 신학교에서는 감리교회가 이미 정답이라고 결정한 것만 가르치겠다. 교단이 이단이라고 정한 신학은 연구도 토론도 하지 않겠다. 교수 역시 교단의 신학적 판단에 어긋나는 내용을 연구하거나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하나의 선택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대신 솔직해야 한다. 교육부의 인가를 받은 정규 대학이기를 포기하고 교단 내부의 비인가 신학교로 운영하면 된다. 교단이 자체적으로 학생을 모집하고, 교단이 원하는 교과과정을 만들고, 교단이 승인한 선생들만 가르치게 하면 된다. 물론 그렇게 되면 지금과 같은 의미에서 대학은 아니게 된다. 수시와 정시를 통해 정규 대학생을 모집할 수도 없을 것이고, 감리교신학대학교 이름으로 정규 학사학위와 석·박사학위를 수여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학생들이 일반 대학생으로서 누리는 국가장학금이나 학자금대출 등의 제도에서도 벗어나게 될 것이다. 대학을 전제로 하는 여러 공적 지원과 제도 역시 더 이상 당연하게 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것이 감리회가 원하는 학교라면 그렇게 하면 된다. 나는 오히려 그것이 더 정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감신대는 대한민국의 정규 대학이라는 지위가 가져다주는 것은 모두 누리면서, 대학이 대학이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책무 가운데 하나인 학문적 자유는 교단의 이름으로 제한하려 한다. 학위는 대학의 이름으로 주고 싶다. 국가가 인정하는 대학생도 모집하고 싶다. 각종 장학금과 대학 제도도 이용하고 싶다. 그러나 교수와 학생이 무엇을 연구하고 무엇을 질문할 수 있는지는 교단과 교회의 입맛에 맞아야 한다. 나는 이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감신대가 순전히 교회라면 내가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교회는 자신이 믿는 신앙고백에 따라 공동체를 운영할 수 있다. 목회자에게 특정한 신앙고백을 요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학은 다르다. 대학은 학문을 연구하고, 그 연구 성과를 가르치며, 민주 시민을 교육하고 양성하는 기관이어야 한다. 물론 감신대는 일반 사립대학과도 다르다. 교단이 설립한 신학교이고, 감리교회의 목회자를 양성해야 하는 특별한 목적을 가진 학교다. 나는 그 사실을 부정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감신대는 더 어려운 일을 감당해야 하는 위치에 서 있다. 감리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르치는 일과 대학으로서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는 일을 동시에 해야 한다. 둘 가운데 편한 것 하나를 버려서는 안 된다. 그 긴장을 감당하는 것이 신학교가 해야 할 일 아닌가? 그 긴장을 견딜 생각이 없다면 그냥 교회 교육기관이 되면 된다. 혹자는 이 글을 보고 저 사람은 감신대를 망하게 하려 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분들을 위해 조금 더 덧붙인다. 내 주장은 정말로 감신대를 교단 내 비인가 신학교로 전환하라는 것이 아니다. 지금 감신대에서 일어나는 꼴이 꼭 이와 같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감신대를 사랑했던 선생으로서 나는 감신대가 대학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기를 그 누구보다도 간절히 희망한다. 학문의 자유를 회복하고, 자신과 입장이 다른 신학적 입장들에 대해 논쟁하고 토론하기를 멈추지 않으면서, 다른 종교를 지닌 사람들과도, 심지어는 무신론자들과도 합리적으로 토론하고 논쟁할 수 있는, "신학함"이 살아 있는 학생들을 길러 내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일이 있다. 감리교신학대학교는 변선환의 신학적 정신과 유지를 기억하고 계승하라. 정제기 / 경운대학교 벽강교양대학 조교수 정제기 고백이 학문적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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